[삶속에] ‘이태원 클라쓰’ 소고

 

얼마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웹툰을 원작으로 만든 것이기에 스토리는 그야말로 만화스럽다. 고등학생인 주인공 ‘박새로이’는 새로운 학교에 전학한 첫날, 같은 반 친구를 괴롭히는 불량학생을 멋지게 때려눕힌다. 그런데 불량학생의 아버지는 그 학교를 쥐락펴락할 뿐만 아니라, ‘장가’라는 이름의 요식업계를 대표하는 그룹의 회장이었다. 새로이의 아버지는 그 회사의 부장이었다. 폭력 사건으로 학부모와 학생, 학교의 대표들이 모이게 된 자리에서 회장은 모든 것을 용서할 테니 자신의 아들에게 무릎을 꿇고 빌라 한다. 새로이는 평소 아버지에게 사람은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기에 그럴 수 없다 한다. 새로이의 아버지 역시 아들 편을 들자 화가 난 회장은 그를 그 자리에서 해고시켜버린다. 그리고 새로이는 퇴학당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장의 아들은 새로이의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죽게 만든다. 학생 신분으로 운전한 것 하며, 사고가 의도한 것인지, 우연한 것인지 정확히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여하튼 뺑소니를 쳤고, 후에는 다른 사람이 사고를 낸 것으로 위장한다. 새로이는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사실을 알게 되고, 회장의 아들을 찾아가 죽을 만큼 패준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살인미수가 되어 새로이가 옥살이를 하게 된다. 새로이는 옥에서 복수를 다짐한다. ‘장가’를 넘어서는 회사를 만들어 회장과 그 아들을 자신에게 무릎 꿇리겠다 다짐한다.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다. 새로이는 ‘단밤'(honey night)이라는 요식업 브랜드를 만들어 승승장구하고, 결국 사업을 확장하여 ‘장가’를 인수하기에 이른다. 결국 어떻게든 그것을 막으려는 늙은 회장은 새로이에게 비굴하게 무릎을 꿇게 된다. 그리고 회장의 아들은 새로이를 죽이려 시도하다 발각되어 옥에 갇힌다.

내용은 간단하고 허황되지만, 장가 집안과 주인공 새로이의 대비는 여러 생각할 거리를 준다. 작가는 새로이가 사업을 일구어 가는 과정을 유쾌하게 그린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거의 희박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리는 인간상을 보여준다. 그는 장사를 하면서 항상 두 가지를 강조한다. ‘사람’과 ‘신뢰’. 즉, 사람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사업체를 운영하고, 이것이 반드시 성공이라는 결과를 줄 것이라 믿고 전진한다. 그래서 새로이가 어떻게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지, 어떻게 사람을 세워가는지 보여준다. 그에 반하여 ‘장가’의 회장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경쟁이 되거나 걸림이 되는 모든 인간을 개, 돼지 취급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사자성어는 ‘약육강식’이다. 이 두 대비가 얼마나 선명한지 목사인 필자에게는 마치 세상의 방식과 하늘의 방식을 보여주는듯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상향이 있다. 장가의 방식은 우리가 세상에서 흔히 경험하는 것이다. 돈과 성공을 위해서라면 언제나 사람은 뒷전인 세상. 가치가 전도되어 물질이 존재를 앞서는 세상. 우리는 그런 현실에서 물고 뜯고 서로를 아프게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한편에 늘 기대하고 기다리고, 말하는 세상이 있다. 사람이 중요하고, 사랑이 경험되고, 믿음이 우선되고, 소망을 꿈꿀 수 있는 세상. 이태원 클라쓰는 그것을 만화적으로(?) 선명하게 보여주어 시청자들의 찬사를 얻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끝나고 보니 ‘그래, 만화니까 가능하지’하는 씁쓸한 회한이 밀려온다.

새로이와 그리스도의 방식에 차이가 있을까? 복수심을 인생의 에너지로 삼은 새로이는 그리스도인의 이상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사업을 일구어 가는 방식은 그리스도의 식과 닮았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믿어주고, 함께 잘 살고자 하는 모습 등이 그렇다. 약한 사람들을 짓누르는 강자를 심판하는 모습도 닮았다. 약육강식을 외치던 자를 약자로 만들어 무릎 꿇리는 모습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기에 드라마로 대리만족하는 것이다. 우리 현실에서 사람 소중히 여기고, 믿어주는 식으로 장가보다 더 큰 기업을 일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드라마나 영화가 이렇게만 그려지는 것에 불편을 느끼고, 생각해야 한다. 이태원 클라쓰가 그리는 것처럼 약자를 괴롭힌 강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더 큰 강자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식이 아니다. 통쾌하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 세상의 방식이다.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이다. 새로이처럼 살면 더 큰 강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즉 반드시 성공이라는 결과를 줄 것이기 때문에 새로이처럼 살아야겠다고 하면 안 된다. 우리는 그 삶이 옳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한다. 새로이는 위기를 무사히 척척 넘기지만, 위기를 넘기지 못해도 그 길을 가야 한다. 성공이라는 결과에 매이지 않을 때 계속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살리는 방식은 성공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바울의 말로 글을 맺고자 한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20:24)

 

– 이순범 목사

 

2020-06-12T11:11:00+09:00